광장에서 대중문화가 사라졌다 - 허지웅

'프리미어'를 몇년만에 사보고 깜짝 놀랐다. 잡지 제호를 가리면 '한겨레21'인지 '프리미어'인지 헷갈릴 정도로, '영화' 보다는 '사회와 문화'에 대한 얘기가 잔뜩 실려 있었다. 특집으로 '2008년 광장에서 사라진 대중문화'를 진단하며 배창호, 김지하, 한동헌, 우석훈('88만원 세대 저자')을 인터뷰 하더니, '스타덤'으로 연영석에 관한 글을 쓰질 않나, 신기주 수석기자의 '68 이후'는 68혁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아주 좋은 글이었다. 내가 '프리미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상은 '스크린'의 헐리웃 버전. 그러니까 헐리웃 스타의 뒷얘기나 캐스팅 소식 정도 깊이의 영화 이야기를 다루는 엔터테인먼트 매거진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걸까. 편집장의 이름을 보니 아주 오래전의 그 사람이 맞는데. (더 놀라운 것은 '스크린'도 변했다는 것이다. 뭐 그 얘긴 나중에 하도록 하고)


이번호(No.47)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기사는 역시 허지웅 기자의 글이었다. 어떤 글에 100% 공감하기도 참 오랜만인 것 같다. 그 전문을 아래에 옮겨본다.
 

 
중요한 때 중요한 장소에는 늘 중요한 대중문화가 존재했다. 그러나 2008년 광우병 정국의 광장에는 대중문화가 없다. 68혁명 즈음의 유럽과도, 87년의 한국과도 다른 양상이다. 대중문화의 실종은 무엇 때문인가.


광장에 대중문화가 사라졌다. 온전하게 적확한 수사는 아니다. 있다가 사라진 게 아니다. 처음부터 없었다. 우리가 평소 듣고 보고 읽던 것들이 지금의 광장에선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김장훈이나 윤도현, 이승환 같은 주류 가수들이 드물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촛불 문화제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실제 폭력진압이 시작되고 광장 위에 힘이 넘쳐날 때 대중문화의 기수들은 사라졌다. 눈에 띠지 않았다. 혹은 드러나려 하지 않았다.


광장에서 간간히 불리고 들리는 노래들은 대부분 과거로부터의 유산에 불과했다. 지금의 것이 아니다. 지지율 7퍼센트의 대통령이 6월 10일 밤 청와대 뒷산에 올라 촛불로 밝혀진 광장을 바라보며 떠올렸다는 것도, 그 광장 위에서 양희은이 부른 것도 저 옛날의 ‘아침이슬’이었다. 물론 ‘아침이슬’은 하나의 상징이 된 노래다. 문제는 2008년 대중문화의 무기력이다. 광장에 대해 발언하려 하지 않는다. 광장에서 한 걸음 벗어나 극장을 가고 서점을 가고 TV를 켜면 비로소 거기 지금의 대중문화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시점의 어떤 영화도 가요도 문학도 사상도 광장에서만큼은 무력하다. 찾아볼 수 없다. 작동하지 않는다. 그 기능이 정지해버린 것이다.


중요한 때 중요한 장소에는 늘 중요한 대중문화가 존재했다. 대중문화는 당대의 시대성을 대변했다. 또한 정치적 입장을 보다 유연한 방법으로 드러낼 수 있게 도왔다. 쉬이 섞일 수 없는 것들을 모으고 분열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대화하게 했다. 그렇게 대중문화 운동이 됐다. 이를테면 1968년의 프랑스가 그랬다. 그해 2월 고다르와 브뉘엘을 위시한 누벨바그 영화인들의 행진은 당대의 저항정신을 대변하고 상징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강력한 전조였다. 같은 해 5월 파리의 대학들은 일제히 봉기해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혁명을 일으켰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샤르트르의 책을 읽고 극장에서 누벨바그 영화를 감상했으며 광장에서 짱돌을 들었다.


비슷한 시기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 운동은 68혁명의 불온한 공기로부터 영향 받은 시네아스트들에 의해 태동됐다. <졸업>부터 <미드나잇 카우보이>까지, 기존 질서로부터의 독립과 저항을 논하는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단지 내용과 형식에 그치지 않았다. 주류 할리우드 제작 방식을 버리고 독립적인 형태의 ‘다른 영화’ 만들기에 주력했다. 요컨대, 거기에는 시스템 자체에 대한 반성과 회의가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 전후의 한국에서도 대중문화는 소극적이나마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들국화, 시인과 촌장, 김현식, 부활, 시나위의 대표곡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다. 최루탄을 온 몸에 뒤집어쓰고 쓰러진 대학생의 책가방 안에도, 그 대학생에게 방망이질을 하던 전투경찰의 관물대 안에도 이문세의 음반이 있었다. 노찾사 최초의 합법적 공연이 열린 것은 87년 가을이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안재성의 <파업>, 백무산의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방현석의 단편 <새벽 출정>, 정화진의 단편 <쇳물처럼>들이 모두 1987부터 1988년 사이에 발표됐다. 시민들은 읽고 보고 들으면서 6월 항쟁의 정신을 떠올렸다. 우리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 것인지 환기했다.


예전 광장에 대중문화가 있고 지금은 대중문화가 없어 나쁘고 후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정신이 폄하될 만큼 하찮다거나 예술인들의 결기가 희석됐다는 지적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과거의 기억들은 그 자체로 별개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장단이 있고 성공과 실패가 있었다. 이를테면 한국은 6월 항쟁 이후 도로 노태우를 뽑았다.
 
 
문제는 2008년 광장에서의 대중문화 실종이 현 시국의 구조적 실체를 드러낸다는 데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정부와 보수단체들은 지금의 소요가 진보와 보수의 대결인양 포장하기에 급급하다. 보수진영의 논객들 역시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조갑제는 “군대를 동원해야 한다”고 했고 이문열은 “(촛불시위대에 맞서는) 의병이 일어날 때”라고 주장했다. 재미있는 건 광우병 정국이 오기 전까지는 기존 보수진영과 이명박 정부 사이의 관계가 그리 편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조갑제는 진보진영에 대한 현 정부의 입장이 너무 미온적이라 불평하곤 했다. 지난 3월에는 “(현 정부가) 하는 모든 일이 마구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됐다”고 했다. 또 “이명박의 실용은 이념이 없는 계산”이라 꼬집으며 “한국어를 문법에 맞게 쓸 줄도 모르는 초보 중 초보”라고 비난했다.


조갑제의 분석이 맞다. 현 정부는 이념에 아무 관심이 없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특성이다.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결정적인 차이점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를 정의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자본이다. 돈이다. 개방과 실용과 복지축소, 경쟁력 강화, 공공 서비스 민영화 등 모든 정책의 기조에는 돈을 모든 것에 우선하려는 논리가 있다. 물론 모두를 위한 돈은 아니다. 일부 부자들의 주머니를 불릴 돈이다.


결국 광우병 정국을 이념 갈등인양 포장하는 데는 뒤늦게 지지 세력을 모으려는 정부의 느린 셈과, 이 기회에 정부로부터 자기 몫을 챙기고 지분을 보장받으려는 보수진영의 얕은 셈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광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이념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저 주머니가 얇아지고 건강이 위협받으니 화가 나서 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가의 이익을 극대화시켜야만 정체성이 보장되는 이명박 정부의 당연한 수순이다. 향후 서민경제의 궁핍함은 더욱 심화될 게 빤하다. 지금에 이르러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루고 있는 모든 구조기반은 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광장에 대중문화가 사라진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또한 돈 때문이다. 전부 돈에 먹혀서다. 일부 독립예술진영을 제외한 한국의 모든 대중문화 기반이 자본에 의해 완벽히 통제되고 있다. 주류 대중문화는 원래 돈의 논리를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도 돈이 모든 것에 우선하지는 않았다. 재능 있는 싱어 송 라이터나 감독, 작가가 불합리한 시스템에 방해받지 않고 데뷔하거나 인기를 얻는 게 가능했다. 이제는 문이 좁아지다 못해 자물쇠가 걸렸다. 개인이 노력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이미 기반 자체가 잠식된 것이다.


영화는 90년대 후반 대작열풍이 불면서 진작 거대자본에 휘둘려왔다. 영화계에 흘러 들어온 외부의 거대자본은 공정하게 분배되기보다 일부에 의해 독식됐다. 신자유주의 논리를 좇은 김영삼 정부 이래로 문화정책 역시 시장개방과 해외공략에 주력해왔다. 그것이 생산적이고 실용적인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결과 한국영화는 불비한 현실에 그보다 더욱 희미한 미래를 맞이했다. 고사 직전이다. 한두 편 대작이 성공한다고 뒤집어질 상황이 아니다.


음악에 있어서 싱어 송 라이터의 시대는 거의 막을 내렸다. 기획사가 모든 걸 통제한다. 기획사를 통하지 않은 가수는 데뷔하기 어렵다. 힘들게 음반을 내도 노래를 부를 무대가 없다. 모든 기획사는 대중의 취향과 수익률만을 고려한다. 자연히 들을 노래가 없다는 불평이 쏟아진다. 덕분에 철지난 옛 노래의 리메이크가 부쩍 늘었다.


문학 또한 다르지 않다. 당장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20대'라는 키워드를 검색해보라. 첫 번째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책들이 출력될 것이다.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20대가 꼭 알아야 할 경제지식> <20대여, 지금 당장 주식에 투자하라> <20대 직장인 부동산에 빠져라> <대한민국 20대, 내 집 마련에 미쳐라>. 경제 분야에 한정해서 검색한 게 아니다. 성공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매뉴얼로 가득하다. 그런 책들이 잘 팔린다. 모두 경제 논리에 지배되고 있다. 의식의 문제에 우선해 시스템의 문제다. 그렇게 통제되고 있는 상황에 개별 예술가나 예술작품이 체제에 저항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체제를 이루고 있는 구조의 기본 단위가 이미, 자본이다. 자본 안에서 자본에 저항한다? 어불성설이다.


이 딜레마는 광장 위의 시민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시민의 삶도, 대중문화도 모두 자본에 먹혔다. 시민들은 정부에 대항하고 있다. 언뜻 체제에 대한 저항의지가 기본적으로 전제돼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체제의 정체에 대한 고민은 드물다.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어떤 목표를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시민사회 내부의 확인이 지연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전히 광우병 프레임에 갇혀있다. 대통령이 퇴진하고 국민투표가 실시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환기가 없다면 학습이 되지 않는다. 학습이 되지 않으면 이명박 이후 또 다른 이명박 대통령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광장에 대중문화가 사라졌다. 돈이 모든 것에 우선하도록 구조화됐기 때문이다. 광장은 정부에 맞서고 있다. 자본을 실용의 이름으로 신봉하는 정부다. 광장의 분노는 일부 계층의 사익에 종사할 각종 민영화, 경쟁력 강화, 개발 정책의 천박함과 비실용성에 대항하는 것이어야 한다. 대통령이 아니라 체제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발동해야 한다. 더불어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며 지금의 대통령을 선택한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부자나라가 되면 시민 개인이 부자가 된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혹은 부자가 되는 것이 행복의 최소조건이 되는 경제구조가 연장되는 이상, 소요와 혼란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지리멸렬한 대중문화 또한 그렇다.
- 허지웅 프리미어 기자


by 밤의 숲 | 2008/07/03 22:01 | 世界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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